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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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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오릉  상세보기
    세계문화유산의 숨결 짙은 조선왕릉서오릉은 조선왕릉 40기 중 5기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세조의 세자였던 장(후에 덕종으로 추존)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상 능지로서 좋은 이곳이 추천되어 경릉터로 정함으로써 능지로 선택이 되었다. 이후 창릉, 명릉, 익릉, 홍릉이 들어서면서 큰 왕족의 능이 무리를 이루어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과 영조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경원, 숙종의 후궁으로 질투심이 많았던 장희빈의 대빈묘가 있다.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릉이며 잘 관리되고 있는 왕릉의 위엄과 고즈넉한 자연경관에 많은 이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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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  상세보기
    고즈넉한 조선 왕릉에서 역사를 만나다서삼릉은 조선조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자리하여 중종과 인종 2대의 능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명종과 숙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후궁, 왕자, 공주, 옹주 등 왕실 묘 51기와 역대 왕과 왕족의 태가 안장되어 있는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1864년(고종1년) 제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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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공양왕릉  상세보기
    몰락한 고려왕조의 한을 만나다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와 함께 묻혀 있는 왕릉이다. 조선초 1394년에 조성되었으며 무덤 양식은 쌍릉 형식으로 비석, 상석, 석등, 석호, 문인석, 무인석 등 능 주위에 배치 된 석물들은 고려 왕릉의 전통적인 특징대로 소박하다. 왕을 따라다녔다는 삽살개가 석수가 되어 왕과 왕비가 호수에 빠져죽자 그 위치를 알리고는 빠져죽은 뒤 이곳 무덤에서 주인을 지키고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옹색하여 망국의 한을 지닌 고려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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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장군 묘  상세보기
    청렴과 충성의 고려명장 “최영”대자산 기슭에 자리한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인 최영(1316∼1388) 장군의 묘소이다.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하여 1기의 묘로 만들었고 위쪽에 그의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다.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어 공직자들의 귀감이 된 인물이다.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는 등 많은 공을 세운 충신 이었으나, 요동정벌의 명을 받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킨 후 1388년(우왕 14) 이성계에 의해 참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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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녕대군 묘  상세보기
    총애하던 아들을 잃은 태종의 사모가태종임금에게는 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 네 아들이 있다. 막내인 성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가 각별히 총애한 아들로 홍역으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아끼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앞에 대자암이라는 암자를 지어 막내아들의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원래 ‘산리동’이었던 마을명을 ‘대자동’으로 바꾸게 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묘 입구에 큼지막한 사당이 있고, 봉분 크기 또한 조선왕들의 무덤과 비교해도 손색 이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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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산성  상세보기
    행주대첩 승리의 현장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승리의 현장이다. 1593년(선조 26) 이곳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이끄는 2,300여 민관군이 3만여 왜군과의 혈전 끝에 승리하였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그때 입은 치마를 ‘행주치마’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인 행주산성에는 도원수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와 행주대첩비, 기념관 등이 있으며 한강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풍광과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7월에서 9월 기간 중 한시적으로 야간 개방을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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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상세보기
    삼국시대부터 격전지, 장엄한 자연 속 산성북한산은 지세가 험준하여 방어지로서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높았다. 삼국사기에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백제가 북한산에 성을 쌓았다는 최초 기록이 나온다. 이후 삼국간의 전쟁 주도권을 결정하는 격전지였으며 북한산의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555년).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시되었고 이곳에서 몽골과 전투를 벌였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오늘날 산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북한산성의 90% 이상은 고양시 관할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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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국사  상세보기
    상서로운 빛을 품은 천년고찰신라 661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 중 상서로운 기운을 따라 산을 내려와 인연도량인 약사여래를 모시고 절 이름을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라며 흥성암이라 하였다. 18세기 조선 21대 왕인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에 행차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었으며 흥국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극락구품도와 괘불,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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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운사  상세보기
    ‘상서(祥瑞)로운 구름 속의 사찰’이란 이름의 상운사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로 원효봉,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등 수려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세워져 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상운사는 신라시대에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에서 잠시 수행을 할 때 창건할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이후 상운사는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 상운사는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지만, 한때는 130여 칸에 달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상운사는 북한산에서 3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는 아이를 못 낳는 분에게 아이를 낳게 해 주고, 영험있는 약사부처님이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빼어난 주변 경관으로 인해 불자들뿐 아니라 많은 등산객이 즐겨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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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암  상세보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절.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713년(숙종 39)에 총섭승(摠攝僧) 성능(性能)이 창건하였다. 숙종 때의 북한산성 축성 당시 산성의 수호를 위한 승군(僧軍)을 거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건한 12개 절 중의 하나이며, 최초의 규모는 25칸이었다. 그 뒤 1860년(철종 11)에 중수하였는데, 보담(寶曇)이 쓴 상량문에 의하면 그 당시까지 상당히 많은 승려들이 머물렀고 많은 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중건 및 변천에 관한 기록은 알 수 없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창건주이자 북한산성 도총섭을 맡았던 성능의 사리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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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향교  상세보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6에 소재하는 이 향교는 조선 숙종 15년(1689년)에 건립되었으며 명륜당과 동.서재가 이루는 제향 공간이 뒤쪽에 위치하는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 배치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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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밤가시초가  상세보기
    조선 후기 서민의 삶이 깃든 초가집정발산 북동쪽에 자리한 약 170년 전에 건립된 조선 후기 중부지방의 전통 서민주택이다. 예전 이 마을은 밤나무가 울창해 밤가시 또는 율동이란 지명으로 불리었고 ‘밤가시초가’는 밤나무를 주요 생활용품과 건물의 재료로 사용한 것에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안방, 부엌, 건넌방, 헛간이 ㅁ자형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가운데 하늘구멍을 뚫어 놓았고 그 아래 마당을 한단 낮추어 비나 눈이 올 때 떨어지는 낙숫물이 밑의 단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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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마을  상세보기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을 따라서.......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 국문으로 시를 지으며 가사문학을 꽃피웠던 송강 정철이 머물던 곳이다. 송강 정철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했고 그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듯 그의 호를 딴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시민들이 세운 송강 정철 시비가 있으며 송강고개, 송강보, 송강 낚시터 뿐만 아니라 송강 선생을 사랑했던 여인 강아의 묘와 송강문학관이 자리한다.